비행기 표를 끊자마자 곧 후회했다. 남미여행의 첫 도시를 볼리비아 라파스로 정하다니, 뒤늦게 아차 싶었다. 고산병은 체력에 상관없이 사람에 따라 복불복처럼 걸리는데, 나는 안타깝게도 고도가 높아지면 바로 두통, 숨가쁨 증세가 나타나는 쪽이다. 그런 주제에 아무런 고도 적응 기간도 없이 비행기로 해발 3400m의 도시에 곧바로 착륙하는 일정을 짠 것이다.


소로체필. 대부분 케이스 없이 필요한 만큼 낱개로 잘라서 판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소로체필'이라는 알약을 사서 입에 털어넣었다. 공항에서 사면 시내보다 두배 이상 가격이 비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별 수 있나. 시내까지 무사히 걸어 나가는 게 무엇보다 급선무. 이 약의 효과에 대해서는 여행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꽤 약효가 잘 통했다는 사람도 있다. 약의 성분이 뭔지 제대로 알아본 바는 전혀 없지만, '플라시보' 효과가 한 몫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소로체필'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무사히 시내로 빠져 나와 숙소에 짐을 풀 수 있었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서, 밤에는 '낄리낄리 전망대'까지 올랐다. 라파스의 치안에 대해 워낙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혼자 가긴 두려워서 다른 여행자들을 수소문해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숨이 막혀 왔다. 산에다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집이 그냥 산을 이룬 수준이다. 산 꼭대기까지 빼곡히 늘어선 집들.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음... 눈썹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이마 꼭대기까지 풍성하게 자라난 것을 본 기분이랄까;; (아, 그냥 한 말인데 괜히 상상만해도 무섭다;;) 아무튼 단순히 달동네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부족하다. 


석양 무렵의 전경. 시야의 끝까지 집이 들어서 있다. 설산이 봉우리만 보이는 걸 보면 이곳의 고도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정유진


 볼리비아 정부는 지난해 라파스에 3개 노선의 케이블카를 설치했다. 지금 새로운 노선 하나를 더 짓고 있는 중이다. 케이블카는 보통 관광용이지만, 이곳에서는 산 꼭대기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수 교통수단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요금도 매우 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탈 수 없을 정도로 아찔하다. 45도 이상의 급경사를 타고 올라가는데, 바람이 불면 출렁출렁 하는 것이 웬만한 놀이기구 뺨친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노선은 노란선이지만, 나는 빨간선만 타봤다. 종점까지... 간 후 고도계 어플로 측정해보니 3900m이다. 아마 노란선 종점은 4000m를 넘어설 지도 모른다. 


케이블카 안에서 찍은 사진. 은근히 무섭다. @정유진


아, 그런데 소로체필을 너무 믿었나보다. 약발이 다했는지, 아니면 전날 전망대에 케이블카까지 타면서 너무 무리했던 탓인지,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갑자기 덮쳐온 고산병 증세가 너무 심해져서 오전 내내 끙끙 앓았다. 호스텔 직원이 방에서 엉금엉금 기어나간 날 보고 놀라 황급히 코카차를 타 주면서 이거 마시고 무조건 쉬라고 한다. 


낯선 나라에서 아프면 무척 서럽다. 오후가 돼서 좀 진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몸보신을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택시를 잡아타고 한인식당을 찾아갔다. 비싼 한인식당 카드를 여행 시작 둘째날부터 벌써 써먹다니ㅠ 한국인 사장님은 고산병 때문에 죽다 살아났다는 나의 하소연에 "센트로 지역에 숙소 잡았죠? 거긴 높은 데잖아. 3000m 넘어가면 몇백m도 차이가 커요"라고 말했다. 


실제 이 한인 식당이 위치한 곳은 라파스의 부촌 동네. 사장님의 말에 따르면 부촌 동네는 센트로보다 몇백m 고도가 낮다. 그리고 센트로는 산꼭대기 마을보다 300m 가량 고도가 낮다. 즉, 산꼭대기에 사는 라파스 빈민들은 부자들보다 고도가 500~600m 가량 높은 곳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사는 집의 고도가 그의 사회적 계급을 말해주는 도시다. 


실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다보면 그 차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래 쪽에는 수영장까지 갖춰져 있는 으리으리한 집들이 늘어서 있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풍경은 브라질 파벨라 수준으로 바뀐다. 


이 곳은 가난한 도시다. 시내를 걸어다니다보면 꾀죄죄한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할머니가 어린 손주를 데리고 길거리에서 구걸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쩌면 할머니가 아니라 고생 끝에 조로한 엄마일지도 모른다. 노숙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4000m 이상의 고도에서조차 허락된 공간이 없다. 


그런데도 그 가난 때문에 밤이 되면 그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야경을 선사하는 곳이 또 라파스이다. 산꼭대기까지 반짝이는 불빛으로 뒤덮인 전경. 하지만 불빛이 화려할 수록 더 슬퍼지는 야경이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싶다. (2015.12)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후 집집마다 불이 켜진 야경의 모습. @정유진


Posted by 정소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