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페루에서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잉카트레일을 걸었을 때의 일이다. 3박4일 동안 산속에서 캠핑을 하며 해발 4000m 이상의 안데스 산맥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나름 험난한 여정이었다.


나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온 코트니라는 이름의 여성과 같은 텐트를 쓰게 됐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잘만 걷던 그는 산소 부족으로 이미 절반은 초주검이 된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넌 결혼했니? 아님 싱글?”
“응, 나 싱글인데.”
“그렇구나. 애는 있고?”
“나 싱글이라니까.”
“그래 알아. 애는 있냐고.”


‘숨쉬기도 힘든데 왜 자꾸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하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이 대화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대답했다. “응, 나는 싱글이고 아이는 없어.” 알고 보니 코트니는 귀여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이혼 여성이었다. 한부모 가족에 대한 기사를 그렇게 읽고 써 왔으면서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되고 만다. 도대체 나의 일상적 사고 속에 피부처럼 들러붙은 고정관념과 편견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일까.


최근 방송인 이다도시가 TV에 나와 인터넷 쇼핑몰 회원가입 신청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혼 여성인 그는 ‘미혼’ ‘기혼’을 묻는 항목이 나오자 당연히 ‘미혼’에 체크했다. 그런데 ‘미혼’을 선택하는 순간 아래쪽에 있던 자녀 정보 기입란이 자동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다도시는 “이 나라에서는 아이가 있으면 미혼일 수 없다는 뜻 아니냐”라면서 “미혼으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나 혼자는 아닐 텐데, 그걸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코트니에게 했던 실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인터넷 쇼핑몰 개발자가 기술이나 시간이 부족해 미혼-자녀 정보 기입란을 못 만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편견의 굴레는 나의,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얼마나 깨알같이 침투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편견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어서, 나는 가해자이면서 때로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소위 ‘결혼 적령기’를 넘긴 이 땅의 미혼 여성들은 몇년치 겪을 수모(!)를 한번에 당해야 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열렬한 시청자였다던 박 대통령의 병원 예약명이 ‘길라임’이었다는 보도가 나오자 어떤 사람들은 “남편도 없고 애도 없으니 밤에 드라마나 보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결혼 안한 여자가 대통령이 되니 신통치 않다”는 ‘망언’을 남겼다. 아니, 그래서 ‘결혼한 남자’인 전 전 대통령 본인은 과연 신통한 대통령이셨나.


미혼인 지인들과 모일 때마다 서로 자신이 겪고 들은 차별적 언사들을 공유하며 한풀이를 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아마 우리도 지금 이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게 상대방에게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무심히 똑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우린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더 크게 말하고 다니자. 상대방이 알아차릴 때까지.”


예전에 테드(Ted)에서 들은 강연 내용이다.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백인 남성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에게 물었다. “넌 아침에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이니?” 백인 여성이 대답했다. “한 명의 여성이 보여.” 흑인 여성이 말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구나. 나는 한 명의 ‘흑인 여성’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백인 남성은 거울에 무엇이 보인다고 말했을까. 답은 “한 명의 인간(Human being)”이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직접 경험해본 적 없는 굴레를 잘 보지 못한다. 백인 여성의 눈에는 인종이 보이지 않고, 백인 남성의 눈에는 인종과 젠더 모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환경이 존재를 규정하고,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제든 무심코, 한 치의 악의 없이, 편견 어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지금의 한국은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호소하면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돼 있는 편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예민함부터 탓한다. 다수의 편견이 힘센 사회는 그로 인해 상처받은 소수에게 “소수의 관점을 다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오히려 호통을 친다.


자신이 언제든 상대방에게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내가, 우리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기로 했다. 일단, 미안합니다. 그리고 노력하겠습니다.

Posted by 정소군